전자부품 제조업에 속해 있으니까 당연히 '기술'이라는 말은 일터 어디서나 듣게된다. 기술 하나로 회사가 서기도 하고, 기술 하나로 사업전략을 바꾸기도 하고 기술 하나로 떼돈을 벌기도 한다.
어느날 갑자기 눈부시게 떠올라 세상을 바꾸는 '기술'들을 보자면, 그 모습이 너무 고차원적이고 완벽해서 어떻게 저런 기술이 나타날 수 있을까? 어떻게 저런 것을 다 실물로 구현해 낼 수 있는 걸까? 하는 감탄을 자아낸다. 이런 넘사벽 기술들은 마치 벌판 가운데에 갑자기 부르즈 할리파가 턱을 높이 들고 우뚝 서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반면에 학회장이나 전시회 같은 곳에 가면 완전히 다른 분위기의 여러 기술들을 접한다. 유치해 보인다. 논리가 약하고 득보다 실이 훨씬 많아 명백하게 별 쓸모가 없는 기술들이 대부분이다. 대부분은 논문용으로 소모되거나 샘플 제작으로 그치는, 부르즈 할리파는 커녕 판잣집이라는 표현도 사치스러운 기술들이다.
그러면, 부르즈 할리파 기술들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
기술도 피라미드 모양의 계층구조로 되어있다. 여러 평범하고 곧 사라질 운명의 판잣집 기술들이 피라미드의 가장 밑바닥을 이루고 있고, 많이 쓰이는 범용기술이면서 별로 새로울 것도 없고 돈도 되지 않는 기술들이 그 다음층에, 또 그보다 조금 나은 기술이 그 다음층에, 또 그 다음층에.. 하는 식으로 쌓여 있는 것이다.
모든 기술들의 출발점은 같다. 유치하고 별 쓸모가 없어보이는 단계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그렇게 싹이 튼 연약한 상태의 '기술'은 연구자의 열정과 재능과 보잘것 없는 후원을 양분삼아 생존에 성공하고, 운이 좋으면 미약하나마 조금씩 자라나 판잣집 기술이 된다. 그러다가 산업의 흐름이라는 환경을 맞이하게되면 기술이 드러나서 알려지며 연구자들이 모이기 시작한다. 비슷한 기술이 등장하고 경쟁하기 시작하며, 재료와 장비같은 연관기술이 지원되면서 '기술'은 점점 세련되게 다듬어진다. 그렇게 '기술'이 경쟁하며 다듬어지는 '축적의 시간'을 지나 드디어 문턱점(theshold)을 넘어서면, 작은 판잣집, 잘 되어봐야 이층집이던 기술이 부르즈 할리파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지금은 '기술'을 키워 '돈'으로 바꾸는 속도가 제조업의 흥망을 좌우한다. 유망주를 찾아 스타 선수로 키워, 비싼 값에 되파는 스포츠단 프런트처럼, 부지런히 유망기술을 키워 돈으로 바꾸어야 한다. 기술은 제품으로 구현하여 돈을 만들 수도 있고, 기술 자체를 팔아서-기술 사용료를 받아서- 돈을 만들 수도 있다. 이것이 제조업 회사가 가진 '기술능력'이다. 제조업 회사의 연구조직은 '기술'을 만들고, 제품개발조직은 '기술'을 '돈'으로 바꾼다. 생산기술조직과 영업조직은 '돈'을 현금으로 바꾼다.
그러므로 제조업 회사의 '기술전략'은 명백하다. 내가 가진 기술의 장점으로 시장을 공략하고, 경쟁사가 가진 기술의 장점을 펼치지 못하도록 게임의 룰을 조금씩 바꾸어 가는 것이다. 그러면서 경쟁사가 나의 기술의 장점을 갖추지 못하도록, 포기할 것은 포기하더라도 장점을 극대화 할 수 있는 테크트리를 정해서 '빠르게' 기술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스타크래프트 게임을 하려면 당연히 따르는 기초 중의 기초 개념이기도 하다.
규모가 큰 회사라면 포기할 것에 대해 고민을 적게 해도 될 것이다. 다 해볼 수 있으니까. 그렇지만 그럴수록 수많은 판잣집 기술을 빠르게 시험해 보고 빠르게 버리는 스킬이 필요하다. 버리는 기술이 쌓일수록 건지는 기술도 늘어나고, 부르즈 할리파는 빠르게 올라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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